이름이 사라진 공간, 학교

김희옥

 

 

하자센터에는 특별한 호칭문화가 있다. 진작부터 콜레지오(하자센터의 인문학교실)의 아이들은 센터장 조한혜정 교수를 그냥 ’조한‘이라고 부르고, 부관장 전효관 박사를 ’전군‘이라고 부르며, 나를 ’히옥스‘라고 부른다. 교수님, 부관장님, 박사님, 선생님 등의 호칭은 없다. 호칭의 체계는 사회적 질서를 적나라하게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호칭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아이들은 조금 자유로움을 맛본다. ’전효관 부관장님‘일 때는 어렵다.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전군‘으로 통일되자 눈에 띄게 달라진 현상이 있다. 아이들은 ’전군의 생각은 어때요?‘라고 한다. 전군의 생각을 묻는 일이 많다. 전군이 아무리 어려운 말로 알튀세가 어떻고 신자유주의가 어떻다며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하여 아이들을 아연하게 만든다고 해도, 아이들은 자주 ’전군의 생각‘을 묻는다.

 

또한 나는 콜레지오의 어떤 아이를 ’원‘이라고 불러야 하고, ’문지원‘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또 한 아이는 ’하토‘라 부르고 ’김한결‘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하토를 ’화투‘라 놀려도 되지만, ’김한결‘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아이들은 어느 날 ’나를 ××이라 부르기를 원한다‘고 선언하며, 그 뜻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작년 11월 나는 남이와 퀸 오로라를 데리고 타이페이에서 열렸던 NGO대회에 참가했었는데, 그 대회 측에서는, 공식적으로, 남이와 퀸 오로라의 본명을 묻지 않는 ’예의‘를 지켜주었다. 그들이 만들어 준 대회이름 표에는 ’Nami, Haja Center‘, ’Queen Orora, Haja Center‘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특히 언론사의 경우라면, 어떻게든 끝까지 본명을 알아내서 남이(본명 ×××, 자퇴생)이라고 적어서 콜레지오 아이들의 분노를 산다. 남이는 성(姓)쓰기를 거부하는 아이이고, 자퇴생이 아니라, 일반고에서 방통고로 적을 옮겼을 뿐이다. 아이들은 타이페이와 그곳의 NGO그룹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별명 부르기는 여성주의적 대안문화 동인그룹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진행하는 어린이캠프의 문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캠프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사람이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한다. 초등학생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와 ‘히옥스, 밥 먹었어?’라고 묻는 것은 예사이다. 별명이 ‘괜찮아’였던 ‘조한’에게, ‘괜찮아는 밥 먹었어?’라고 묻는 것을 보고, 몇몇 학부모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면서,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문제제기를 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아이들은 ‘조한’과 ‘괜찮아’를 꽤 사랑한다. 콜레지오의 아이들은 어린이캠프에서처럼 반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별명 부르기를 도입함으로써 호칭을 없애고 자꾸만 그 별명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아이들은 별명을 통해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상대방도 그렇게 자신을 만나주기를 원한다. 사회적 관계의 그물이 ‘위계적’이라고 느낄 때 그것을 과감히 삭제해버리고 싶어 한다. 아예 하자센터에서는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없다. 선생과 학생이 아니라, 함께 작업하는 동료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스탭들은 문화판과 작업장의 판을 돌린다는 뜻의 ‘판돌이’라는 이름을 고안했다. 십대를 부르는 호칭은 따로 없다가, 센터에 매일 죽치고 앉은 아이들은 서로를 ‘죽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판돌이에 호응하는 명칭이고, 이제는 센터의 모든 청소년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학부모들처럼 가끔 어떤 판돌이들은 그런 문화에 어색함을 표시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별명을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판돌이조차 나에게 다가와 ‘누나’라고 불렀다가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그도 지금은 그냥 ‘히옥스’라고 부른다. 어른들이 어려워하는 것에 비하면, 아이들은 변한 호칭에 쉽게 적응하는 편이다. 개인과 개인이 순수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내부의 열망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은 학교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부터 온다.

 

다시 말해, 센터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찾기의 문제이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며, 그 시도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들을 새로 정립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정체성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한 사람의 ‘개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 개인이 묵살되는 경험이었다. 아이들의 우스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교사가 지저분한 교실을 보고 ‘주번 나와’하고 고함을 치면서 아이를 불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 있는 도중에 청소도구를 가지고 교실에 들어서는 주번을 보게 되었고, 쓰러진 아이에게 ‘너는 뭐냐’고 했더니, ‘저는 9번인데요...’했다는 얘기이다. 학교의 아이들은 번호로 불린다. 오늘이 16일이기 때문에, 6번, 16번, 26번, 36번의 아이들은 긴장해야 하는 날이다. 영화 [여고괴담]에서 교사는 2000년의 6번 아이와 1999년의 6번 아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수천의 6번인 아이들이 교사들과 마주 서 있는데도, 교사들에게는 그저 ‘6번’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나’라든가, ‘개인’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아이들이 느끼는 고민의 지점이다.

 

학교제도가 성립되던 근대초기의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번호를 매기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고 오히려 권장해야할 사항이었을 것이다. 번호를 매김으로써 아이들은 평등하다. 그 아이가 병원 원장집 아이이건, 개장수의 아이이건, 모두가 ‘6번’일 수 있고, 그러한 한 아이들은 교사에게 똑같다. 교사들이 만약 병원집 아이에게 눈길을 한 번 더 주었다면, 촌지를 받았네 어쩌네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골고루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아이들은 그러한 평등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가 6번으로 인식되는 동안 아이들은 존재감을 상실하고 괴담의 주인공이 되고 귀신처럼 부유하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평등하게 모두가 비존재화, 비인간화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존재를 묵살당한다고 생각하면서, 번호를 부르는 교사를 이미 폭력적이라고 인지한다는 것이다.

 

실상 가까운 관계일수록 아예 이름이 필요 없다. 정말 자주 만나는 친구는 이름을 부를 기회조차 없다.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친구의 이름은 ‘너’일 뿐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너’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정말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이다. 정말 가까우면 이름이 증발해버린다.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족들끼리 이름 부르는 법이 없는 것도 그 예이다. 아무도 그것을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소규모의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항상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개체화’된다는 의미인데, 하나의 공동체에서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질감의 표현일 때가 많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낯설게 하기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름이 무화되는 그러한 관계이며 공동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의 확인을 필요로 하고 있고, 교사나, 그 외의 또 다른 타인들로부터의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아이들과 만나는 교사들은 그러한 열망에 대답을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것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아무 의미도 내용도 없는 ‘6번’이 아니라, 그 사람, 그 개인, ‘너 자신’일 수 있는, 아이가 선택한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우리교육" 200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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